누가 AI 모델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누가 정할까요? 2026년 6월 12일, 이 질문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국적. 인쇄술에서 인터넷까지, 인류의 역사는 지식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가득합니다. 이제 인공지능의 차례입니다.
2026년 6월 12일 아침, 세상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내려진 작은 결정 하나가 훨씬 더 큰 무언가를 드러냈습니다. 미국 상무부가 앤트로픽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가장 앞선 모델인 Claude Fable 5와 Mythos 5에는 미국 시민이 아닌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 튀르키예인이든 인도인이든 브라질인이든 독일인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외국인이라면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명분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국가 안보. 앤트로픽은 위험이 과장되었다고 반대했고, 같은 정보는 이미 다른 모델로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지침은 시행되었습니다. 누가 미국 시민인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회사는 모델을 전 세계에 대해 완전히 닫아 버렸습니다.
18일 뒤인 6월 30일, 상무부는 제한을 해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앤트로픽은 7월 1일부터 Fable 5에 대한 접근을 전 세계에 다시 열었습니다. 다만 Mythos 5는 여전히 프로젝트 글래스윙에 참여하는 일부 기관에만 제공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결정을 거둬들였지만 이번에도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 결정의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점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과 지식 사이에는 언제나 어두운 관계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퍼지면 권력은 흩어지고, 권력이 흩어지면 통제는 약해집니다. 어느 시대에나 이 순환은 권력을 쥔 이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잃을까 하는 두려움은 얻고 싶은 욕망보다 훨씬 강한 동기라는 것을. 사람은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것을 얻기 위해 쏟을 노력의 두 배를 쏟습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도, 국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을 쥔 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됩니다. 이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 편집증이 되고, 편집증은 온갖 정당화로 바뀝니다. 역사상 가장 가혹한 검열과 가장 무자비한 금지는 대부분 악의적인 계획이 아니라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반사작용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가 인쇄술에 반대했을 때, 아마 그들은 진심으로 신앙을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더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두 의도 가운데 무엇이 더 강했는지는 당시의 성직자들조차 구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AI를 제한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정당한 우려를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우려 밑에는 결코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이 도구에 똑같이 접근한다면, 오늘의 권력 균형은 의미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인쇄술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것은 글을 모르는 농민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어차피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저항한 것은 지식의 중개를 쥐고 라틴어를 독점처럼 쓰던 성직자 계급이었습니다. 인쇄술은 그 독점을 무너뜨렸습니다. 인터넷을 가장 의심스럽게 본 것은 컴퓨터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저항한 것은 뉴스 유통을 독점하던 거대 언론사들이었습니다. 인터넷은 그 독점을 뒤흔들었습니다.
AI를 가장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들 역시 기술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석을 만들고, 보고서를 쓰고, 지식을 포장해 가치로 팔며 그 대가로 경력과 지위와 돈을 얻는 모든 종류의 전문가들입니다. AI가 바로 그 중개 역할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 한 명이 연구팀이 며칠 걸리던 일을 몇 시간 만에 해냅니다. 환자는 진료를 받기 전에 자기 상태를 깊이 이해합니다. 창업가는 컨설팅 비용을 주머니에 그대로 넣어 둡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경제 모델과 지위의 위계가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이들은 공황에 빠지고, 그 공황은 정책이 됩니다.
미국의 이번 결정은 새로운 전략적 패러다임의 신호입니다. 워싱턴은 수년 동안 반도체 수출을 이 틀 안에서 관리해 왔습니다. 엔비디아 칩을 누구에게 팔 수 있는지, 어느 나라가 얼마만큼의 연산 능력을 가질 수 있는지가 전략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같은 틀이 모델, 곧 생각하는 도구에 직접 적용되고 있습니다.
논리는 단순하고 결과는 무겁습니다. 더 빠르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쪽이 이깁니다. 경제에서, 과학에서, 국방에서, 외교에서. 이런 의미에서 AI를 통제한다는 것은 인류가 함께 생각하는 능력의 일부를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튀르키예의 연구자가 접근할 수 없는 모델은 미국의 경쟁자에게 구체적인 이점을 줍니다. 나이지리아의 엔지니어에게 닫힌 도구는 실리콘밸리의 동료에게 길을 열어 줍니다. 이 불평등은 더 이상 경제적이거나 교육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지적이고 알고리즘적인 단절입니다. 이 단절이 메워지지 않으면 인류는 두 층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AI와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럴 수 없는 사람들로.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이 보입니다. 지식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길게 보면 언제나 실패했습니다. 라틴어의 벽은 무너졌습니다. 라디오 주파수는 극복되었습니다. 인터넷 검열은 계속 뚫리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알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그것을 막으려는 이들이 세운 장치보다 언제나 더 강했습니다.
AI에서도 같은 과정이 작동할 것입니다. 오픈소스 모델이 퍼지고, 대안 플랫폼이 세워지고, 탈중앙화된 구조가 자라고 있습니다.
실제로 Fable과 Mythos의 사례는 작은 규모로나마 이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제한은 18일 동안 이어지다 풀렸습니다. 짧은 창이었지만 보여 준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토록 강경한 조치조차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기적인 낙관이 오늘의 고통을 덜어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접근이 막힌 연구자는 오늘 풀지 못한 문제와 홀로 남겨집니다. 언젠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오늘의 상실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AI를 둘러싼 담론의 대부분은 두려움의 언어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우리를 조종할 것이다.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우려 가운데 일부는 실제입니다. 모든 강력한 도구가 그렇듯 AI도 나쁜 손에 들어가면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유일한 틀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했습니다. 언어는 생각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문자는 그것을 시간 너머로 실어 날랐습니다. 인쇄술은 그것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인터넷은 지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AI는 다른 일을 합니다. 지식을 처리하는 능력, 곧 생각의 속도와 깊이를 넓힙니다.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진화하는 것. 한 사람의 뇌가 평생 읽을 수 있는 자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언어도, 연결할 수 있는 분야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AI는 이 한계를 늘려 줍니다. 인간의 생각을 키우고, 그 뿌리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딛고 더 높이 솟게 합니다.
AI는 몇몇 국가와 기업의 손에 남을 수 있습니다. 접근은 국적과 경제력과 동맹에 따라 정해집니다. 인지적 단절은 깊어집니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도구는 바뀌어도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아니면 AI는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자리 잡습니다. 접근은 보편적 권리로 여겨집니다. 기술은 갈등이 아니라 해결에 봉사합니다. 기후 위기, 건강 불평등, 교육 격차에 전 지구적 지성이 투입됩니다.
이 선택은 기술적 결정이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입니다.
병 속의 남자는 주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의 두께가 시야를 일그러뜨립니다.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움직일 공간은 좁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뚜껑을 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AI 접근이 제한된 수십억 명이 오늘 그런 병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무언가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이 돌아가는지에 대해 말할 권리도, 결정 과정에 자리도, 미래를 만들 도구에 대한 접근도 없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꾸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인쇄술이 나왔고, 교회가 저항했고, 르네상스가 태어났습니다. 인터넷이 왔고, 권력이 제동을 걸려 했고, 세계가 바뀌었습니다. AI가 퍼지고, 국가들이 제한 조치를 내리고, 그 조치가 다시 거둬집니다. 순환은 같고 도구만 바뀝니다. 그러나 이 전환의 진통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지식과 가능성이 버려질까요? 그리고 그 값은 누가 치를까요? 이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글은 Ekonomi Dünya 매거진 2026년 8월호의 칼럼 Kavanozdaki Adam(병 속의 남자)에 처음 실렸습니다.